우리가 잘 아는 역사 속 비교적 근대사에 벌어진 사건이 바로 동학농민 운동이다.

대부분 중고등학교 역사시간에 배우고 마는 내용이고 단순히 수능과 학교내신 시험을 위해서

선생님이 가르쳐주느대로 암기만 하고 말았던 역사적 사건인데, 최근 동학개미운동이라는 새로운

신조어가 나오면서 수 많은 개인들이 주식시장에서 수십조원어치 주식을 사들이고 있는 현상을 재치있게

과거 동학농민운동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다시한번 동학농민운동을 정리하고 그 역사적 의의에서 

지금 벌어지는 한국주식시장 개미운동에 대해서 알아봤으면 한다.

 

 

 

동학농민운동의 발발

 

동학은 1860년. 조선말기 최제우에 의해 창시되었다. 봉건사회를 반대하고 서학과 왜를 배척하는 반외세 사상을 주장했는데 그야말로 신분제와 빈부격차로 개돼지 같은 삶을 살던 조선 백성들에게 동학은 상당한 유행을 한다. 당연히 조선왕조와 위정자들은 동학을 사교로 금지하고 탄압을 한다. 결국 1864년 최제우가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을 당한다. 2대 교주 최시형은 동학 탄압에 반발하면서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한다. 동학을 탄압해도 현실이 지옥같다보니 동학의 교세는 날로 확장되는 중이었다.

 

결국 계속된는 동학교도 탄압에 불만이 쌓일대로 쌓인 동학인들에게 도화선이 된 사건이 있었다. 바로 그 유명한 탐관오리 전라도 군수 조병갑의 학정이었다. 이에 1894년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 농민들이 모여 고부 관아를 습격하게 된다. 고부민란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조병갑의 횡포 시정, 외국상인의 침투 금지 등의 요구를 전봉준은 하게 되고 정부에서는 사태 수습을 위해 이를 승인하면서 민란 이후 10일만에 자진해산한다.

 

이후 고부민란을 조사하러 내려온 안핵사 이용태가 오히려 농민들을 더욱 가혹하게 대우하고 역적죄로 몰자 백성들의 불만은 더욱 크게 고조되고, 우리가 명명하는 동학농민운동 봉기의 원인이 된다.

 

 


제1차 봉기(반봉건 운동) 1894년 3월

 

전봉준은 손화중과 손을 잡고 수천명의 농민들을 모아 1894년 3월 동학교주 최시형의 탄생일에 고부 백산에서 궐기한다. 이게 제 1차 동학농민운동이다. 조선왕조는 장위영 등의 군대를 파견 하여 진압하고자 하지만 이미 국운이 기울고 군정의 문란으로 전투력을 상실한 조선군은 동학농민군에게 연전연패를 거듭한다.

 

황토재, 정읍, 흥덕, 고창, 영광, 함평, 장성, 나주, 장성, 태인, 부안 등에서 관군을 모두 물리치면서 삼남지방을 장악하고 전주성까지 점령하기에 이른다.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지 못하고 전국적인 봉기로 이어질 것을 염려한 조선왕조는 청나라에게 원군을 요청하고 5월 5일 청군이 아산만에 상륙한다. 반외세를 주장하던 전봉준은 외세의 개입을 심히 염려하여 이 소식을 듣고 바로 관군과 폐정개혁을 실시하겠다는 전주화약을 맺는다.

 

하지만 톈진조약에 따라 청나라 군대가 조선땅에 발을 딛은 순간 일본 역시 군대를 파병할 권리가 생겼고 이에 5월 9일 인천항에 일본군이 상륙하게 된다.

 

전주화약을 맺은 관군과 동학농민군은 모두 철군 및 해산했다. 하지만 이미 관에 대한 신뢰와 위엄이 사라진 상태에서 사회혼란만 더 커지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에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봉준이 각 군현에 농민 자치기구인 집강소를 설치 12개 폐정개혁안을 바탕으로 민정을 실시한다.

 

 

 

 

폐정개혁안 12개 항목


① 동학교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일소하고 서정에 협력
② 탐관오리 엄벌
③ 횡포한 부호를 엄징
④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
⑤ 노비문서 소각
⑥ 천인에 대한 대우 개선
⑦ 청상과부의 개가 허용
⑧ 무명잡세 일체 폐지
⑨ 관리채용 시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 등용
⑩ 왜와 통한 자는 엄징
⑪ 기왕의 공사채를 무효로 할 것
⑫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

 

 


제2차 봉기(반외세 운동)

 

 

청나라와의 톈진조약을 빌미로 조선에 입성한 일본군은 6월 2일 김홍집을 앞세워 친일내각을 설립, 조선정부에 내정개혁을 강요했다. 6월 21일 경복궁에 침입 고종을 감금하고 23일 청일전쟁을 일으켰고 25일 1차 갑오개혁을 강행했다.

일본군의 행태에 전봉준은 일본군 척결을 위해 전라감사 김학진과 손을 잡고 제2차 거병을 준비. 9월 18일 삼례에서 제2차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킨다. 일명 삼례봉기. 동학농민군은 서울로 향했고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등 전국적 항일운동이 확산되어 세가 커졌다. 이에 정부는 군을 출병시키고 일본군에도 출병을 요청하여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개량된 신식 무기와 규율잡힌 일본군에게 일반 농민군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우금치전투에서는 관군과 일본군에게 대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진다. 동학농민운동은 나름의 의의가 있지만 실패한 농민봉기로 기록되게 된다.

 

 

 

동학농민운동의 의의.

아래로부터의 운동. 사회개혁을 요구하는 백성들의 목소리를 대변.

능동적으로 조선왕조의 신분제 타파 요구 및 노예제도 폐지 요구에 대해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움직임으로 평가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히 한계도 명확한데, 우물안 개구리의 좁은 시야로 세계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청나라와 일본의 힘의 균형이 일본에게 기울어 있었다는 점을

알지 못했다.

 

신분제 타파를 요구하고 있지만, 사대와 봉건적인 조선왕조 타도에 대해서는 요구를 하지 못한다.

반외세를 주장하고 있지만 청나라에 대해서는 어떤 목소리도 내지 못했다. 

 

동학농민운동은 조선왕조의 관군과 일본군에게 동학농민군이 대패를 당하게 되는 결과였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주식시장 개미들의 폭풍매수, 기관와 외인의 폭풍매도. 지금 1차 동학운동기간일지

아니면 2차 동학운동의 기간일지는 알 수 없지만 동학농민운동은 결국 손에 잡히는 현실적인 변화는

하나도 없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지금도 각종 증권맨들과 방송인들이 스피커에 대고 꿈같은 소리 정신승리하는 이야기들로 개미들을

꼬시고 있는데 결말이 좋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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